'나는 가수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다'
시원한 형
2011년 7월 16일
순위메기기 그리고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가 벌써 횟수로 5개월이 되었다. 초반에 너무나 뜨거웠던 열기와 논란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그 열기가 장맛비에 몸을 적신 것처럼 한 풀 꺾였다. 내가 처음 ‘나는 가수다’를 접했을 때에 첫 느낌은 ‘당혹감’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멸감’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음악을 혹은 예술을 점수화시키고 평가한 다는 것은 굉장히 불쾌했다. 그리고 일정한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고 가장 적은 점수의 가수를 떨어뜨린다는 것은 나의 머리를 한 번 더 세게 쳤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슈퍼스타K나 위대한 탄생 등의 프로그램 또한 ‘경쟁’과 ‘탈락’을 보여준다. 같은 경쟁과 탈락이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큰 문제의식이 없었는데 이 문제가 충격적인 이유는 대략 이렇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준비생이 아닌 일정한 반열에 오른 음악가조차도 순위 매기고 경쟁시킨다는 것. 그리고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둘째는 그런 예의 없고 취지가 엉망인 프로그램에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대부분 출연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예술의 잘못된 만남
‘그들은 왜 출연했을까?’ 첫 회 출연자의 인터뷰를 상기하면 이소라씨나 윤도현씨 등의 가수들은 프로그램의 방식이 굉장히 불편하다는 것을 내비췄고, 윤도현씨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거절할까 고민했다고 한다. 박정현씨나 김범수씨 임재범씨 등도 다르지 않을 거라 본다. 한편 뒤에 언급한 세 가수는 가창력에 비해서 많은 대중성과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가수다. 그 이유는 요즘 음악계는 음악보다 음악 외적인 기획사의 마케팅과 연예프로그램 출연 등으로 얼굴을 알리고 인기를 누리는 경향성 때문이다. 대부분 그런 쇼프로그램과는 인연이 먼 가수들이지만, 그들도 미디어가 갖는 힘과 영향력은 무시 못 한다. 그 영향력은 몇 해 동안 음원차트 1위 및 상위권을 독점했던 아이돌의 자리를 나가수의 가수들이 밀어낸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런 구조 안에서 그들은 선택은 과연 자발적이었을까? 선택했다기 보다는 선택되어졌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경쟁의 폭력은 익숙하다 그러나 정당하지 않다.
‘국민가수’ 김건모씨가 떨어질 때 그의 표정과 주위사람들의 반응, 누구보다도 감성적인 음악을 하는 이소라씨의 일반적이지 않은 돌발적인 감정 표출. 이 모든 것은 실력 있는 가수의 ‘탈락’이라는 불협화음이 얼마나 당사자의 명예와 존엄성에 상처를 입히는지에 대해 노래한다. 여기서 김제동씨가 재도전을 제안했고 네티즌들은 엄청난 비난과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마치 대역죄를 진 사람처럼 언론과 커뮤니티는 그의 대한 ‘네티즌들의 뭇매’로 도배되었다. 그들의 주된 논리는 이것이다. 학교, 학원, 대입, 취업, 스포츠, 예술 등 모든 분야가 경쟁체제 안에 있고 좋든 싫든 대다수는 흐름을 따르고 있다. 그런 세상의 흐름 안에서 김제동은 ‘공정한’ 룰은 깬 불공정한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탈락자 김건모씨가 ‘국민가수’와 ‘대선배’라는 특수한 상황이었던 것이 동료가수들과 매니저들의 극단적인 반응의 변수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김제동이 깨려고 했던 것은 ‘공정성’이 아닌 탈락과 동시에 가수의 존엄성마저 탈락 시켜 버리는 정당치 못한 구조가 아니었을까 ?
체화된 무한 경쟁에 대한 보상심리로 탈락자의 아픔을 무시 한 체 합리적인 룰만을 강조하는 기계적인 ‘이성’이 정당할까? 아니면 거꾸로 김건모씨의 쓰디쓴 표정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화 된 경쟁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정당할까? 그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빵과 서커스 빵과 리모컨
얼마 전에 영화를 한 편 봤다. 글레디 에이터라는 영화다. 그 영화에서 막시무스는 검투사이고 칼과 방패를 들고 다른 검투사들과 때로는 맹수와 싸운다. 주목할 점은 고대의 시민들이 싸움이 끝난 후 검투사의 생명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착각한다. 검투사의 생사여탈권이 자신들의 손에 있으니 정치적인 주권이 자신에 손에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진정 그들의 삶과 연관되는 문제의 결정권은 그들이 아닌 황제와 귀족에게 들려져 있고 그들 손에는 단지 빵만이 들려있을 뿐이다.
네티즌들의 비아냥
아까 잠시 꺼냈던 이야기를 더해보겠다. 김제동의 불공정함, 이소라의 신경질적인 반응, 김건모의 선배의식 전부다 네티즌이라는 ‘위험한’ 요리사에 의해서 언론이란 칼로, 각 종 인터넷 커뮤니티란 도마 위에 오른 체 무참하게 난도질당했다. 네티즌들은 연예인이라는 대상의 행위에 대한 평가와 호불호의 감정표현으로 방송출연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듯 인터넷 상에서 군림한다. 그러나 고대 로마와 마찬가지로 등록금이나 최저임금, 비정규직 문제 등 실질적으로 ‘삶’ 과 연결된 결정권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손에는 단지 리모컨이 들려있을 뿐이다.
‘나는 가수다’의 프레임
‘나는 가수다’에는 뛰어난 보컬의 능력과 훌륭한 감정표현 그리고 최고의 퍼포먼스를 만드는 가수들이 등장한다.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의 네티즌들은 정말 ‘그들이 가수다’라는 감탄의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 프레임 안에 갇혀서 더 중요한 예술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잃어버린 퍼즐의 한 조각은 바로 사회성이다. 나는 가수다의 곡의 주제는 대부분 굉장히 편향된다. 사랑, 이별, 그리고 외로움 (임재범씨가 부른 윤복희씨의 여러분)... 물론 인간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감정이고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예술이 탄생한 우리의 삶으로 눈을 돌리고 다시 그 무대를 바라본다면 그것이 온전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
우리나라의 남쪽 끝 부산의 영도에서는 한 여인이 180일이 넘는 시간동안 크레인 위해서 고공 농성을 한다. 대학에서는 등록금을 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들이 연례행사를 한다. 카이스트에는 경쟁의 폭력에 희생된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실존이 착취된다. 800만 명이 넘는 비정규직, 복직을 노래하는 해고된 노동자들, 그리고 사회에 편견에 억압받는 성소수자들, 장애인의 날에 조차 배제되는 장애인들, 이주 노동자들, 수많은 아픔과 부조리가 실재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음악은 반드시 아름답고 슬픈 사랑이야기 혹은 외로움이라는 개인의 감정만을 노래해야 하나? 분명히 그러한 경향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가?’ 는 다른 문제다. 예술이 발 딛고 있는 땅에서 언제부터 괴리되었을까? 물론 역사적으로 예술의 공공성이 올바로 서있는 시절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현 시기에 극단적으로 그것이 괴리된 것은 자본과 예술의 ‘잘못된 만남’이다.
‘나는 가수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다’
한 번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나는 가수다’ 에 관해서 논쟁하던 중에 이런 의견을 들었다. ‘예능에 왜 정치-사회적 잣대를 들이 대냐’. ‘예능은 예능일 뿐이다’ 현재 일상에 대한 탈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수이고 또한 주류이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는 단순한 예능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반영이고 또한 사회를 재생산 한다. 그것이 미디어고 언론, 자본의 힘이다.
일요일 밤 나는 가수다가 끝나고 월요일 아침부터 평생 끝나지 않는 ‘나는 인간이다’ 라는 프로그램의 출연하는 우리들. 인간이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끝없이 자신을 상품화, 도구화하고 있는 어느 순간 경쟁은 내면화된다.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경쟁과 억압의 확대는 결국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우리가 음미하는 타인의 고통에는 이미 우리의 고통이 녹아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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