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 악마를 배제하다. (스포)

 

악마를 보았다

 

흔히 말하는 ‘악마’ 라는 존재가 실제 한다는 가정 하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의 형상을 본다면 비명과 함께 ‘끔찍하다’라는 말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할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의 나의 느낌 또한 그것과 동일했다 ‘끔찍하다’

차량 안에 있는 여자를 겁탈하기 위해 , 망치로 차 유리를 깨고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찍고 단두대로 머리를 자르고 사람고기를 생으로 식탁위에서 썰어먹는 등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장면들이 많았다.

내가 잔인한 영화를 잘 보는 편이 아니라서 흔히 말하는 고어물 보다는 수위가 약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꽤 오래 전부터 일정하게 올라오던 뉴스에 을씨년스러운 내용이 자연스레 연상 되면서 단순히 ‘영화’라는 방어벽을 쌓고 보기에는 굉장히 힘들어진다.

이 영화는 하나의 정신적인 폭력으로 시각-청각화 되어 우리를 괴롭힌다. 영화가 시작되고 10분이 채 안됐을 때다. 경철이 세연을 폭행하는 장면에서 뒷자리에 여성이 극장을 떠났다. 이 사실처럼 보는 내내잔인하고 끔찍한 내용들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영화, 관객들이 봐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

 

왜, 만들었나?

 

첫 느낌은 끔찍하다. 두 번째느낌은 는 ‘왜?’ 였다.

감독은 왜 이런 불편하고 끔찍한 영화를 만들었을까 ?

 

흥행?

사람은 잔인하고 수위가 높은 폭력을 피하면서도 동시에 간접적으로 엿보고 싶은 갈망을 느낀다. 호기심에 한 두 번 보는 스너프 필름이나 합법적인 폭력인 이종격투기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그 목적만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면 김지운 감독은 흔히 말하는 싸이코 패스에 가까울 것이라 본다.(본인은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을 신봉하지는 않고 통념을 인용한 것이다.) 또한 이런 폭력물보다 인기 있는 여배우를 시나리오와 상관없이 벗기는게 훨씬 더 편할 것이다. 난 그가 ‘예술가’라는 전제를 가지고 영화를 이해하기로 했다.

 

시대 반영

위에서도 언급했다 시피 연쇄살인범의 납치-강간-살인-유기 로 이어지는 범죄사건이 굉장히 많다. 얼마 전에 세상을 경악케 했던 유영철과 강호순 그리고 범인이 잡히지 않거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미수로 그친 사건 거기에 언론에 주목을 받지 못해서 묻힌 사건까지 합치면 훨씬 더 많은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시대의 잘못된 부조리 앞에서 감독은 카메라를 든 또 하나의 저널리스트가 된다.

익숙해짐은 둔감을 낳는다. 잔혹한 뉴스의 반복으로 인해 우리는 어느새 담담해진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피해자들은 영화에서 수현의 약혼자처럼 공포에 질리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물들어 가고 있다. 우리는 살인과 강간이라는 가장 극대화된 폭력장면에 그대로 노출되는 폭력을 당하면서 역설적으로 피해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가슴을 아파하게 된다.

 

의도된 배제인가?

영화 후반부에 수현이 장경철을 심하게 폭행하고 차안에서 룸밀러를 보았을 때, 짧은 순간이지만 흠칫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 부분에서[악마를 보았다.]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이 영화는 한 평범한 남자가 악마가 되어 복수심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는 과정이다. 그것을 관객들의 동정과 함께 충분한 공감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 공감이 살해용의자의 집에 무단 침입해 성기를 박살내고 일부러 차 사고를 내 폭행하고 살해범을 마치 짐승을 사냥하듯 가지고 놀며 복수하는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행동을 정당화한다. 이 정당화 과정에 다른 한편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장경철의 행동의 원인이다.

영화에서는 수현의 악마성과는 다르게 장경철의 악마성은 진단하지 않는다. 아내가 사라지고 아이와 노부모를 떠난 이유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심지어 성격이 삐뚤게 된 원인이나 첫 살인을 하게 된 원인 마져 전혀 없다.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산정을 차지하고 있는 경철의 친구의 대사에서 약간의 이유를 엿볼 수 있기는 하다.

우리 처음 만날을 때 기억해 무장단체 만들어서 세상을 뒤짚어 버리자고 했지.’

또 한여자를 손질해서 인육으로 먹으려 하는 장면에서

 ‘그러길래 왜 나를 무시했어?’

 

단서는 적지만 우리사회에 비춰서 생각해보면 결국 기득권에서 배제된 것과 그로 인한 무시이다.

 

경철의 비윤리적인 행동의 원인을 배제한 것은 실제로 이러한 범죄가 있고 난 뒤 대중들의 반응과 같다. 진단 없이 처방만 하게 된다.

 

[살인의 추억, 추격자, 악마를 보았다] 이러한 영화가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나오지 말아야 할 이러한 끔찍한 영화가 연이어서 나온다. 그것은 예술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명제에 다시 한 번 힘을 싣는다.

결국 살인의 존재가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더욱 중요한 질문 무엇이 살인을 만들었을까?

한 사회학자가 한 말이다. ‘모든 범죄는 개인과 사회에서 추구하는 가치의 단절에서 나온다.’ 부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가난한자는 도둑질을, 미디어를 통해 성적욕망을 자극하는 사회에서의 성적욕구의 거세는 강간으로 가시화된다.

물론 죄는 처벌받아야 마땅하고 개인이 행위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이다. 그러나 처벌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결국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의 원인을 줄여나가는 근본적인 처방과는 멀어질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조로 인해 빈부격차가 극대화된 콜롬비아에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방탄유리 사업이 크게 번창한다. 그만큼 피할 수 없는 유산으로 되물림 되는 빈곤과 가난으로 인해 절도가 극심하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된 것처럼 보이는 ‘배제’에서 독자들이 수현의 악마화 과정을 지켜본 것처럼 경철의 악마화 과정을 추적해보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일반적인 대중들의 통념에 비추어 봤을때 그러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 이유에서 이 영화 연출에 아쉬움을 느낀다.

우리는 장발장의 배고픔에는 동정을 하면서 성적인 범죄는 물리적 거세, 전자 발찌 얼굴공개 심지어 사형까지의 처벌을 처방한다. 물론 나 또한 영화를 보는 내 경철에 분노했고 끔찍함에 몹시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그것인 개인적은 기분의 표현일 뿐 ‘사회’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결국 해결책은 이미 나타난 현상 앞에서 광기보다는 보다는 아예 범죄의 구조적인 문제 즉 본질에 대한 이성적인 숙고를 하는 것이다.

만약 다시 이러한 영화를 만든다면 배제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 조명을 기대하겠다.

 

비극을 즐겨라

아리스토텔레스가 2천년도 더 전에 지은 그의 ‘시학’이 아직도 문학과 극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는 비극을 권장했는데 그 이유는 정상적이고 선한 사람이 외부의 원인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데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 감정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 또한 비극을 좋아하고 모두가 비극을 즐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이유가 희극적인 삶을 만들기 위해서 였으면 좋겠다. 화려한 휴가와 박하사탕을 보면서 흘린 눈물은 우리의 마음속에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문장을 세겨놓는다.

그러기위해서는 좀 더 다양한 각도로 예술작품과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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